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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기름 냄새를 따라, 동네 방앗간
간판을 읽기도 전에 냄새가 먼저 닿는다. 서울 동쪽의 어느 시장 골목 중간쯤에서 공기가 따뜻하고 고소하게 바뀐다. 미닫이 유리문 너머에서는 가스불 위로 철제 드럼통이 돌아가고, 한 여인이 빈 자루를 접어 무릎에 올린 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다. 장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져온 참깨가 기름이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남의 재료로 일하는 방앗간
이곳은 동네 방앗간이고, 돌아가는 이치는 식료품점과 정반대다. 손님이 원재료를 들고 온다. 친척네 밭에서 거둔 참깨 한 자루, 투명한 비닐봉지에 담긴 마른 고추, 밤새 불린 쌀 한 대야. 그리고 그것을 부엌에서 쓸 수 있는 무언가로 바꿔 주는 품에 값을 치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고소하게 볶아 짠 참기름, 고춧가루, 혹은 떡을 만들 쌀가루다.
가게에서 직접 마련한 재료로 짠 것을 파는 방앗간도 많다. 자루 없이 온 여행자가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이유다. 유리문에 페인트로 적힌 ‘기름’이라는 글자나 ‘떡 방앗간’이라 써 붙인 가게를 찾으면 된다. 손으로 쓴 골판지 팻말에는 깨의 원산지가 적혀 있다. ‘국산’은 국내에서 기른 것이라는 뜻인데, 수입산과 가격 차이가 워낙 커서 둘은 통을 따로 쓰고 짜는 것도 따로 한다.
드럼통, 압착기, 그리고 초록 병
기름 짜는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을 만큼 짧다. 깨를 씻어 회전하는 드럼통에 붓고, 빛깔이 짙어지고 냄새가 길가까지 번질 때까지 볶는다. 그런 다음 뜨거운 채로 유압 압착기 아래 철제 원통에 담는다. 기계가 웅웅거리고 계기판 바늘이 올라가면, 가느다란 호박색 줄기가 주둥이에서 흘러나와 거름천을 댄 주전자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기름은 깔때기를 거쳐 소주병 모양의 초록 유리병에 담기고, 손으로 뚜껑을 닫은 뒤 행주로 닦아 낸다. 원통에 남는 것은 깻묵이라 부르는 단단한 갈색 원반이다. 텃밭 가꾸는 이들은 거름으로, 낚시꾼들은 미끼로 가져간다. 단골들은 이 모든 과정이 끝날 때까지 의자를 지킨다. 대개 웃음과 함께 돌아오는 오래된 설명은 이렇다. 지켜봐야 병에 든 기름이 내 자루의 깨에서 나왔다는 걸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기름, 그리고 여행자가 지나치는 하나
참기름은 대부분이 이미 아는 기름이다. 마무리에 쓰는 기름으로, 나물을 무칠 때 마지막에 두르거나 비빔밥에 넣어 비빈다. 선반 위 그 옆에, 똑같은 초록 병에 담긴 것이 들깨로 짠 들기름이다. 들깨는 고깃집 상추 바구니에 곧잘 함께 나오는 깻잎의 그 식물이다. 들기름은 풀 향과 흙 내음이 더 짙어서, 한국의 가정에서는 향보다 깊이가 필요한 자리에 쓴다. 김을 굽기 전에 한 장 한 장 바르거나, 집에 따라서는 미역국을 끓일 때 처음 볶는 기름으로 쓴다.
들깨를 볶지 않고 짜는 방앗간도 있다. 그렇게 나온 생들기름은 빛깔이 더 옅고 맛이 순하며, 값은 대체로 더 나간다. 가게 주인들은 묻지 않아도 일러 주곤 한다. 들기름은 냉장고에 넣고 서둘러 먹어야 하고, 참기름은 볕이 들지 않는 찬장에 두면 된다고.
달력을 따라 움직이는 줄
방앗간의 한 해는 가게 앞 길에서 읽힌다. 음력 새해인 설날을 앞둔 며칠 동안은 문밖으로 김이 쏟아져 나오고, 길고 흰 가래떡이 기계에서 밀려 나와 찬물에 잠겼다가 알맞은 길이로 잘려 판에 놓인다. 얇게 썰면 명절상의 중심인 떡국이 된다. 가을 수확 명절인 추석 전에는 송편을 빚을 쌀가루 주문이 몰린다. 식구들이 집에서 손수 빚는 반달 모양 떡이다. 바쁜 주에는 가게 앞 줄이 사람이 아니라 대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야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불린 쌀을 담은 채 그 사람의 차례를 지키고 있다.
늦여름부터 가을까지는 고추의 계절이다. 집집마다 볕에 말린 고추를 자루째 들고 와, 한 해 김치를 담그는 김장에 앞서 빻아 간다. 김치용은 굵게, 고추장용은 곱게 빻아 달라고 한다. 가게 안 공기는 매캐하고, 줄 선 사람들은 함께 재채기를 한다. 더운 철이면 분쇄기는 미숫가루로 넘어간다. 볶은 곡물을 빻은 가루로, 찬물이나 우유에 타서 마신다.
서울에서 방앗간 찾기
가장 촘촘하게 모여 있는 곳은 경동시장이다. 1호선 제기동역과 청량리역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말린 약초와 뿌리지만, 골목마다 문가에서 압착기를 돌리는 기름집이 줄지어 있어 몇 걸음마다 냄새가 참깨에서 들깨로, 다시 고추로 바뀐다. 도시 반대편의 망원시장은 6호선 망원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닿는다. 튀김 가게들 사이에 기름집과 떡집이 섞여 있고, 홍대 일대에서 보내는 오후 일정에 끼워 넣기에도 한결 수월하다.
더 작은 방앗간은 아예 시장 밖에 있다. 주택가 골목 나지막한 벽돌 건물 1층에, 대개 문가에 자루 몇 개가 쌓여 있고 안에서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손님맞이용으로 꾸민 곳이 아니라 일하는 가게이고, 바로 그 점이 찾아갈 이유다. 문턱에 서서 주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단골손님과 그 사람의 깨 사이를 오가는 길목은 비켜 서자.
한 병 사서 집까지 가져가기
평일 오전에 가자. 압착기가 돌아가고 주인이 질문에 답해 줄 여유가 있는 때다. 두 큰 명절 직전의 한 주는 구경하기엔 가장 생생하고, 사기엔 가장 나쁜 때다. 시장 가게들은 쉬는 날이 제각각이고 그마저 바뀌곤 하니, 도시를 가로질러 가기 전에 시장 안내 게시판이나 서울 공식 관광 사이트를 확인하자. 값은 병 크기와 깨의 산지에 따라 달라지며 대개 골판지 팻말에 적혀 있다. 계산대에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카드를 받지 않을 때를 대비해 현금을 조금 챙겨 가자.
참기름을 살 때 필요한 말은 짧다. 이 한마디면 된다.
참기름 한 병 주세요.
피해야 할 실수는 병을 믿는 것이다. 참기름과 들기름은 똑같은 초록 유리병에 담겨 팔리고, 라벨은 손글씨이거나 아예 없을 때도 많다. 그리고 둘은 요리에서 같은 구실을 하지 않는다. 첫 글자만 기억하자. 참기름은 ‘참’, 들기름은 ‘들’. 값을 치르기 전에 그 글자를 주인에게 되짚어 말해 확인하자. 병은 싸 달라고 부탁하고, 위탁 수하물에 세워서 넣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 항공사의 액체류 규정과 본국의 식품 반입 규정을 확인하자. 들기름은 작은 병으로 사자. 생각보다 빨리 다 먹거나, 생각보다 빨리 맛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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