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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따라 이틀, 구례의 절집에서 하동의 차밭까지
기차가 「구례구」 역을 알리면 객차 안 사람들의 절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플랫폼에 내려서면 가장 먼저 강이 보인다. 넓고 얕은 강물은 연하게 우린 차의 빛깔이다. 구례 읍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역 이름과 마을 사이의 이 거리는 섬진강의 성격을 꽤 잘 보여 준다. 이 골짜기에서는 두 도(道)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곳들은 대개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닿는다.
다른 곳의 이름을 단 역에 내리다
구례구역은 전라선에 있지만 강 건너 순천 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글자 「구(口)」는 입구, 어귀라는 뜻이다. 읍내는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택시나 군내버스를 잠깐 타면 닿는다. 기차가 들어오면 역 앞마당에 택시들이 모여들었다가 먼저 닿은 사람을 태우고 떠난다. 그래서 첫 택시는 대개 짐이 가벼운 승객들 차지가 된다.
구례는 지리산 아래 평야에 낮고 평평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첫날 밤을 보내기에 조용하고 좋은 거점이다. 버스터미널 근처에서는 구례오일장이 정해진 날짜마다 지붕 덮인 장터를 가득 채운다. 장날이면 말린 고사리, 신문지에 둘둘 만 산나물, 병에 담긴 산꿀이 나온다. 저마다 한 가지씩만 들고 나와 파는 할머니들도 만날 수 있다. 장날 주기는 구례군에서 공지하니, 장에 맞춰 하루를 짤 생각이라면 미리 확인해 두자.
화엄사, 그리고 단청을 입히지 않은 전각
화엄사는 지리산 서쪽 자락에 있다. 구례터미널에서 일주문 아래 주차장까지 군내버스가 다닌다. 절로 가는 길은 계곡을 끼고 완만하게 오른다. 한국 사찰의 전각은 대부분 처마 밑을 초록, 빨강, 황토색 띠의 단청으로 칠한다. 각황전은 그렇지 않다. 목재는 세월에 바래 은회색이 되었다. 밖에서 보면 지붕이 두 층이지만, 안은 하나로 트인 높은 공간이다. 국내에서 손꼽히게 큰 목조 불전이다. 안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이 먼저 다가온다. 마루가 삐걱이는 소리, 옆문 경첩 소리, 마당 건너 작은 전각에서 흘러오는 염불 소리.
각황전 옆 늙은 매화나무는 꽃빛이 유난히 짙은 붉은색이라 사람들이 「검은 매화」, 흑매라고 부른다. 3월 하순이면 이른 아침부터 사진가들이 이 나무를 찍으려고 돌계단에 줄지어 선다. 본당 마당 뒤 계단을 오르면 사사자 삼층석탑이 나온다. 돌사자 네 마리가 탑신을 떠받치고 있다. 그 맞은편에서는 무릎 꿇은 인물상이 머리에 석등을 이고 있다. 전각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가장자리에 벗어 두고, 가운데 문 말고 옆문으로 드나들자. 사찰 입장 규정은 최근 몇 년 사이 바뀌었으니 입구의 안내문을 확인하자.
사성암, 벼랑에 매달린 암자
읍내 남쪽, 강 위로 오산이라는 작은 산이 솟아 있다. 그 위에 사성암이 있다. 본전이 높은 기둥에 받쳐 바위 벼랑에서 툭 튀어나온 암자다. 이름은 「네 성인의 암자」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지는 스님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마지막 구간 도로는 대개 자가용이 들어갈 수 없다. 대신 산 아래 주차장에서 셔틀 미니버스가 다니고, 요금은 매표소에서 낸다. 정해진 시간표대로 다니기보다 자리가 차면 출발하는 편이다. 날씨가 궂으면 운행이 멈추기도 하니, 걸어 오르기로 마음먹기 전에 매표소에 물어보자.
테라스에 서면 섬진강이 논 사이로 크게 휘돌아 나간다. 아래 평야를 따라 구례의 지붕들이 줄지어 있다. 계단 근처에서는 방문객들이 기와를 사서 매직으로 이름과 소원을 적는다. 그렇게 적은 기와는 훗날 불사에 쓰이도록 쌓아 두고 간다. 테라스는 좁다. 사람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사진을 찍고 나면 비켜선다.
화개, 강이 두 도를 가르는 곳
둘째 날에는 군내버스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간다. 길은 전라도 쪽 강변을 따라가다가 남도대교를 건너 경상도로 들어선다. 화개장터는 화개천이 섬진강과 만나는 자리에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오래된 대중가요로 먼저 이곳을 알았다. 좌판에는 밤, 말린 약초, 종이봉투에 담은 잎차가 놓여 있고, 농사용 칼이 줄지어 걸려 있다. 현금을 조금 챙겨 두자. 이곳의 작은 가게들이 모두 카드를 받지는 않는다.
섬진강은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를 흐른다.
이 고장의 음식은 작은 민물조개로 끓인 재첩국이다. 국물은 거의 우윳빛이 돌 만큼 뽀얗다. 위에 송송 썬 부추를 얹어 밥과 반찬 몇 가지와 함께 낸다. 강변 식당들은 재첩회무침도 낸다. 같은 재첩을 채소와 함께 새콤하고 매콤한 양념에 버무린 음식이다. 둘을 함께 먹고 나면, 한국 사람들이 왜 냉동 재첩 한 봉지씩 사 들고 돌아가는지 알게 된다.
차 골짜기를 따라 쌍계사로
장터에서 쌍계사로 오르는 길을 십리벚꽃길이라 부른다. 「리(里)」는 옛 거리 단위로, 십 리면 몇 킬로미터쯤 된다. 4월 초면 벚나무 가지가 길 위로 맞닿아 터널을 이룬다. 주말에는 차들이 걷는 속도로 기어간다. 그런 날에는 버스를 타거나 아예 걷는 편이 낫다. 길 양옆 비탈에는 차나무가 심겨 있다. 엽서 속 반듯한 초록빛 계단식 차밭은 아니다. 바위와 밤나무 사이로 이랑이 흩어져 있다. 그중 일부는 대대로 이 밭을 일궈 온 집안이 지금도 손으로 딴다.
절 가까이에는 차시배지를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한국에서 처음 차나무를 심은 곳으로 전해지는 자리다. 골짜기를 따라 늘어선 작은 찻집들은 손님을 바닥에 앉힌다. 그리고 작은 다관에서 녹차를 한 잔, 또 한 잔 따라 준다. 하동 차는 따는 시기에 따라 나뉜다. 우전은 가장 먼저 돋은 어린 잎이고, 그 뒤로 세작과 중작이 이어진다. 등급마다 값이 꽤 차이 나니 주문하기 전에 물어보자. 절 마당에서는 오래된 비석을 찾아보자.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글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새긴 글씨는 가장자리가 닳아 부드러워졌다.
평사리, 그리고 악양의 두 소나무
하동읍 쪽으로 더 내려가면 골짜기가 악양 들판으로 열린다. 넓고 평평한 논이 펼쳐지고, 그 한가운데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부부송이라 부른다. 길에서 보면 누가 일부러 그 자리에 세워 둔 것만 같다. 10월에 주변 벼가 황금빛으로 익으면 들판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평사리 마을 위 언덕에는 최참판댁이 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지은 한옥 단지다. 여러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한국의 독자들은 소설에 묘사된 방에 직접 서 보려고 이곳을 찾는다. 사랑채 툇마루에 서면 논과 두 소나무가 곧장 내려다보인다. 입장료와 관람 시간은 가기 전에 하동군에 확인하자.
가는 법, 가기 좋은 때, 그리고 피해야 할 실수 하나
서울에서 여수 방면으로 가는 전라선 열차가 구례구역에 선다. 다만 모든 열차가 서지는 않으니, 어떤 열차가 서는지 코레일 사이트에서 확인하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구례와 하동으로 가는 시외버스도 있다. 반대쪽 끝에서 여행을 마친다면 하동터미널에서 부산 서부터미널행 버스를 탈 수 있다. 골짜기 안에서는 군내버스가 구례, 화엄사, 화개, 쌍계사, 하동을 잇는다. 배차가 드물고 저녁 일찍 끊기니, 첫날 터미널에서 시간표 게시판을 사진으로 찍어 두자. 이 지역에서는 차량 호출 앱이 잘 잡히지 않는다. 숙소에서 동네 택시 번호를 받아 두자.
3월 하순에는 흑매가 피고, 구례 일대의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운다. 4월 초는 화개 가는 길의 벚꽃철이다. 4월 하순부터 5월까지는 첫 차를 따는 시기다. 10월에는 악양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꽃철 주말에는 강을 따라 난 외길이 꽉 막히니, 가능하면 평일에 가자. 꼭 피해야 할 실수는 하나다. 절이나 암자에 내려갈 택시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대개는 없다. 올라가기 전에 돌아올 방법을 마련해 두거나, 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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