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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밝힌 낙산 성곽, 한국 드라마가 서울의 밤길을 걷는 곳
해가 막 진 뒤, 서울 옛 성곽의 낙산 구간에서는 돌의 색이 바뀐다. 성벽 아래쪽에 낮게 설치된 투광등이 화강암을 은은한 호박색으로 물들이고, 그 옆 산책로는 어둑한 채로 남는다. 성벽 너머로 도시가 겹겹이 불을 켠다. 먼저 아파트 단지, 이어 종로의 오피스 빌딩, 마지막으로 남산 위에 바늘처럼 선 N서울타워. 한 커플이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가슴 높이로 든 휴대폰은 서로가 아니라 성벽을 찍고 있다. 한국 드라마는 이 언덕에서 똑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담아 왔다. 그리고 그 장면 앞까지는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다.
카메라가 자꾸 낮은 성벽으로 돌아오는 이유
한양도성은 조선 시대에 서울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성곽으로, 지금도 걸을 수 있는 긴 구간이 남아 있다. 낙산은 네 산 가운데 가장 낮아서, 촬영팀은 등산 채비 대신 승합차 한 대와 손수레만으로 오를 수 있다. 성벽 안쪽 면은 곳곳에서 어깨 높이쯤에 머문다. 두 배우가 다듬은 화강암에 기대면 불 켜진 서울 분지 전체가 그 뒤로 펼쳐지니, 크레인도 필요 없다. 앞에는 오래된 돌, 뒤에는 현대의 서울. 화면에서 단번에 읽히는 구도다. 늦은 밤 귀갓길에, 마침내 꺼내는 대화에 이 언덕이 자꾸 등장하는 이유다.
나머지는 조명이 해낸다. 요즘 서울 거리 대부분을 밝히는 하얀 LED와 달리, 이곳의 투광등은 낮고 따뜻해서 정 자국 하나하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산책로는 대체로 어둡게 남아, 얼굴과 돌만 빛나고 길은 사라진다. 공원 근처 성벽 앞에 서 보면, 어떤 작품이었는지 꼽지는 못해도 여러 드라마에서 본 듯한 프레임이 눈앞에 있다.
성곽에 불이 들어오면 서울이 그 뒤에서 천천히 켜진다.
혜화에서 출발해 공연의 거리를 지나
대부분은 하늘색 노선인 4호선 혜화역에서 출발한다. 동쪽 출구로 나오면 서울 소극장 문화의 중심, 대학로다. 기둥마다 연극과 뮤지컬 포스터가 빼곡하고, 접이식 테이블 앞의 직원들이 그날 저녁 공연 표를 판다. 큰길에서 살짝 들어간 자리에 마로니에공원이 있다. 포장된 광장에는 버스커들이 앰프를 세우고, 붉은 벽돌의 아르코예술극장 근처에서는 학생들이 편의점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는다.
공원에서 동쪽으로 걸으면 땅이 기울기 시작한다. 몇 블록 만에 길은 골목으로 좁아지고, 골목은 쇠 난간이 달린 콘크리트 계단으로 바뀐다. 가게들이 사라진 자리를 가스 계량기와 위성 안테나, 고추와 파를 심은 스티로폼 상자가 채운다. 여기가 낙산의 서쪽 비탈이다. 오르막은 짧지만 가팔라서, 성벽이 보이기도 전에 종아리가 먼저 알아챈다.
이화동은 배경이기 전에 동네다
이화동은 벽과 계단을 벽화로 뒤덮은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서울 바깥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이어 텔레비전이 찾아왔고, 그다음엔 인파가 몰렸다. 하지만 이 계단들은 그런 발길을 감당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결국 주민들은 가장 유명한 작품 몇 점을 페인트로 덮었다.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집 현관 앞까지 줄을 서게 만들던 계단 벽화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 남은 풍경은 더 조용하다. 옹벽에 그린 작은 그림들, 모퉁이의 조형물 몇 점, 그리고 서쪽을 향한 옥상 테라스를 둔 카페 몇 곳.
골목 곳곳에는 인쇄한 것도, 손으로 쓴 것도 있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방문객에게 목소리를 낮춰 달라는 부탁이다. 빈말이 아니다. 현관문이 계단 쪽으로 바로 열리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소리가 쉽게 번진다. 지나가며 있는 그대로를 보고, 오래 머무는 사진 촬영은 위쪽 성벽에서 하자. 성벽은 애초에 보라고 지은 것이니까.
성벽을 따라, 낙산공원에서 흥인지문까지
언덕 꼭대기의 낙산공원에는 전망대와 정자, 길게 이어진 잔디밭이 있다. 여기서 성벽은 두 갈래로 뻗는다. 북쪽으로는 한성대입구역 근처의 작은 복원 성문, 혜화문을 향해 내려간다. 그 길에 성벽 바깥 면에 바짝 붙은 낮은 집과 좁은 골목의 마을, 장수마을 위를 지난다. 카메라가 더 좋아하는 남쪽으로는 능선을 따라 동대문의 흥인지문까지 내려간다.
남쪽 구간에서는 한동안 성벽 바깥쪽을 걸을 수 있는데, 여기서 돌들은 저마다의 역사를 드러낸다. 어떤 단은 거칠고 들쭉날쭉하다. 눈대중으로 맞춰 쌓은 것이다. 어떤 단은 네모반듯하게 다듬어 고르게 놓였다. 후대에 보수하며 쌓은 것이다. 성벽은 수백 년에 걸쳐 다시 쌓이고 덧대어졌고, 나이테를 읽듯 석축에서 그 중건의 시기들을 읽어 낼 수 있다. 성곽 전체 둘레 곳곳에는 그 구간을 맡았던 지역이나 공사 집단의 이름을 새긴 돌도 있다. 빛이 사그라질 무렵, 투광등이 세부를 납작하게 지워 버리기 전에 가까이 들여다보자.
동쪽으로는 비탈이 창신동으로 떨어진다. 작은 봉제 공장들이 건물 1층을 채우고, 원단 꾸러미를 실은 오토바이가 골목 사이를 누빈다. 이른 저녁이면 능선 위에서도 열린 문틈으로 재봉틀 소리가 들려온다. 비탈 아래 흥인지문 옆에는 한양도성박물관이 있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다시 도시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
가는 길, 언제 갈까, 그리고 지켜야 할 것
가장 간단한 경로는 혜화역에서 출발해 이화동을 지나 낙산공원까지 오른 뒤, 성벽을 따라 남쪽 동대문역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공원을 지나면 대부분 내리막이라, 중간중간 쉬어 가며 한두 시간을 느긋하게 채울 수 있다. 짧고 가파른 오르막보다 길고 완만한 오르막이 좋다면 거꾸로 걸으면 된다. 해 지기 30분쯤 전에 공원에 닿도록 하자. 그래야 낮의 빛 속에서 석축을 보고, 이어 투광등이 켜지며 그 뒤로 도시가 채워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가장 쾌적한 때는 봄과 가을 저녁이다. 여름밤은 습하고, 공원 주변 덤불에는 모기가 꼬인다. 겨울에는 이화동 계단이 얼 수 있고 해도 일찍 진다. 성곽길은 입장권을 받는 유적지가 아니라 공공 공원 안을 지난다. 박물관은 관람료와 운영 시간을 따로 정하니, 가기 전에 한양도성박물관과 서울특별시의 한양도성 페이지를 확인하자. 조명 시간도 계절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 그곳에서 함께 확인해 두는 게 좋다. 계단이 고르지 않고 모든 구간에 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접지력 좋은 신발을 신자.
피해야 할 실수는 딱 하나, 해가 진 뒤 이화동 계단을 촬영 세트의 일부처럼 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집에 있고, 따뜻한 계절엔 창문이 열려 있으며, 목소리는 콘크리트를 타고 위로 번진다. 대화와 삼각대는 공원과 성곽길을 위해 아껴 두자. 늦은 시간에 걷는다면 주택가 계단으로 질러가지 말고 큰길로 내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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