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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행궁동, 드라마가 집으로 삼은 낮은 동네
수원 화성의 서문, 화서문 성벽 위에 서면 발아래 마을은 비슷한 규모의 여느 한국 도시와 다르게 보인다. 성곽 안에는 아파트 타워가 한 채도 없다. 기와지붕과 평지붕이 이삼 층 높이로 내려앉아 있고, 감나무가 벽돌담 너머로 가지를 기울이며, 평일 아침 골목에서 가장 큰 소리는 배달 스쿠터다. 이곳이 행궁동이다. 최근 여러 드라마가 등장인물의 집을 찾아 서울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한 이곳까지 내려온 이유가 이 풍경에 있다.
지붕이 낮게 머무는 이유
화성은 조선 후기의 성곽이다. 돌과 벽돌로 쌓은 성벽이 6킬로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길이로 한 바퀴를 두르며, 정조의 명으로 지어져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라 있다. 성 안 옛 시가지는 새로 짓는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는 문화유산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 카메라의 입장에서 그 실질적인 결과는 유리 대신 성문 누각과 팔달산 능선으로 이루어진 스카이라인이다.
덕분에 로케이션 헌터들은 서울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것을 얻는다. 평범한 오늘의 동네로 읽히면서도 뒤로 공사 크레인이 걸리지 않는 주택가 골목이다. 인물은 대문을 나서 짧은 한 블록만 걸으면 컷 없이 18세기 성벽에 닿는다. 이 동네의 별명 행리단길은 서울 경리단길에서 끝 글자를 빌려 온 것으로, 화서문로와 신풍로 일대의 카페 거리를 두루 가리킨다.
걸어서 닿는 세 편의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주인공 최웅의 집을 이 골목 안에 두었고, 성벽과 그 아래 거리를 조용한 산책 장면 여럿에 썼다. 《선재 업고 튀어》는 임솔과 류선재의 마주 보는 집을 화서문로에서 갈라진 짧은 골목 하나에 세웠다. 솔의 집으로 쓰인 파란 대문 집은 카페로 운영되어 왔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신풍로 근처 샛골목의 작은 일식당 위에 「우영우 김밥」이라고 적힌 소품 간판을 촬영 기간 내내 걸어 두었다.
이 가운데 세트는 하나도 없다. 모두 주인이 촬영을 받아들인 살림집이거나 영업 중인 가게이고, 지금 무엇을 만나게 될지는 그 뒤 각 주인이 내린 결정에 달려 있다. 드라마를 알리는 작은 안내판일 수도, 대문 옆 포토존일 수도,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주소는 네이버 지도와 카카오맵에서 드라마의 한국어 제목으로 공유된다. 제목에 촬영지를 붙여 검색하면 영어로 찾을 때보다 더 많은 결과가 나온다.
이 산책의 더 좋은 절반은 성벽이다
북문이자 가장 큰 문인 장안문에서 출발해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걷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성벽은 화홍문으로 내려선다. 일곱 개의 돌 홍예 위에 세운 누각으로, 그 아래로 수원천이 옛 시가지로 흘러든다. 바로 위 바위 언덕에는 방화수류정이 서 있다. 불규칙한 지붕선이 사극에도 웨딩 사진에도 똑같이 등장하는 정자다.
정자 아래에는 용연이 있다. 소나무가 자라는 작은 섬을 품은 둥근 연못이다. 날이 온화한 저녁이면 주변 잔디밭이 돗자리로 채워지고, 뒤편 골목의 가게들은 바구니와 낮은 테이블, 담요를 돈을 받고 빌려준다. 세트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카운터에서 물어보면 된다. 성벽 조명이 켜질 때까지 머물 것. 돌은 호박빛으로 물들고 연못은 그 빛을 받아 비추며, 감독들이 찾아오는 바로 그 구도가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완성된다.
다른 궁궐을 연기하는 궁궐
화성행궁은 왕이 남쪽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임시 거처로, 동네 이름도 여기서 왔다. 제작진에게 이곳은 대역이다. 행렬이 지나갈 만큼 깊은 마당을 갖춘 조선의 궁궐이면서, 대체로 서울의 궁궐들보다 한적하다. 경내 안내판은 오래전부터 사극 《대장금》의 장면을 찍은 자리를 표시해 왔고, 2층 정문 신풍루는 의상을 갖춰 입은 엑스트라를 숱하게 맞아 왔다.
정조 자신도 거듭 주인공으로 불려 나온다. 《이산》과 《옷소매 붉은 끝동》이 모두 그의 이야기를 다루며, 둘 중 하나라도 본 시청자라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의 윤곽을 알아볼 것이다. 옮겨 모신 아버지의 능 가까이에 성곽 도시를 세운 왕의 이야기다. 행궁은 입장료를 받고 계절에 따라 운영 시간이 달라지며, 일부 달에는 야간 개장도 한다. 최신 일정과 입장권 정보는 수원문화재단이 공지한다.
촬영지 사이에서 무엇을 먹을까
행궁에서 남쪽으로 걸어 로터리 한가운데 섬처럼 남은 남문, 팔달문에 이르면 냄새가 에스프레소에서 튀김 기름으로 바뀐다. 수원 통닭거리는 가마솥에 닭을 통째로 튀겨 토막 낸 뒤 치킨무와 소금 종지를 곁들여 내는 가게들이 늘어선 짧은 골목이다. 몇몇 집은 왕갈비통닭도 판다. 영화 《극한직업》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농담으로 만든, 갈비 양념을 입힌 버전이다.
시장은 문 건너편에서 시작된다. 지동시장은 순대타운으로 유명한데, 가게마다 넓은 철판에 순대를 채소와 함께 볶아 낸다. 맞붙은 못골시장은 주민들이 반찬과 떡을 사는 곳이다. 가격은 가게 위 판에 적혀 있다. 현금을 선호하는 상인도 있으니 조금은 챙겨 가자.
가는 길, 그리고 역에서 저지르는 실수
수원역은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수인분당선이 지나고,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일반 열차도 선다. 어떤 열차가 서는지, 요금이 얼마인지는 코레일 사이트와 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당과 강남에서 출발하는 빨간 광역버스는 북문에 더 가까운 정류장까지 간다. 노선과 정류장은 바뀌곤 하니, 오래된 블로그 글에 적힌 번호를 믿기보다 당일에 네이버 지도나 카카오맵으로 확인하자.
실수란 화성이 역 바로 옆에 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팔달문은 버스나 택시를 타야 하는 거리이고, 걷는다면 평범한 상점가를 한참 지나야 해서 성벽에 써야 할 기운을 도착하기도 전에 써 버리게 된다. 역 앞 정류장에서 팔달문이나 화성행궁 방면 시내버스를 타자. 티머니 카드는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버스들에서도 쓸 수 있다.
평일 오후가 주말보다 한산하다. 작은 카페들은 주 초에 하루 이틀 쉬는 곳이 많으니, 동선을 짜기 전에 가게마다 정보를 찾아보자. 성곽 한 바퀴를 온전히 돌기에는 봄과 가을이 알맞다. 여름에는 아침에 행궁을, 해가 진 뒤에 연못을 찾는다. 촬영된 집들은 사람이 사는 골목에 서 있어서, 주민이 집에 있으니 목소리를 낮춰 달라는 안내문을 대문 옆에서 보게 될 수도 있다. 사진은 길에서 찍고, 대문에는 손대지 말고, 조용히 지나가자.
주민이 살고 있는 골목이니 조용히 지나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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